영화상세 본문

영화 메인 탭

레드 툼 (2013) Red Tomb 평점 9.7/10
레드 툼 포스터
레드 툼 (2013) Red Tomb 평점 9.7/10
장르|나라
다큐멘터리
한국
개봉 | 영화시간/타입/나라
2015.07.09 개봉
91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감독) 구자환
누적관객

해방 이후부터 53년 휴전을 전후한 기간 동안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 속에는 지방 좌익과 우익의 보복 학살도 자행되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남한의 군경, 우익단체, 미군의 폭격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 차원에서 구금당하고 학살을 당한 국민보도연맹원이 있다. 전국적으로 23만~4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정치 이념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만든 계몽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과는 직접적인 상관없이 국가의 이념적 잣대로 인해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이다.
(2013년 제39회 서울독립영화제)

연출의도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오래전 과거 정권에 의해 잊힌 역사가 되었다. 참담했던 과거의 기록은 공립 교육 과정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자신의 죽음조차 알지 못한 채 제 발길로 죽음의 길로 걸어갔던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목격자들은 이제 기억이 흐려지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기획은 이런 위기감에서 시작됐다. 4년 전 제작을 시도했다가 제작비를 해결하지 못해 포기해야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규명하면서 이념적 논쟁을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던 시대의 비극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자 한다. 또,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1950년대 미소 냉전시대의 매카시즘으로 빚어진 시대의 참상도 동시에 기록한다. 이를 통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과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전쟁과 이념이 아닌 인권이라는 천부적 권리와 민주주의라는 의제로 관객에게 다가서려 한다.

작품해설
45년 해방 이후부터 53년 휴전협정을 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여러 단체, 군, 경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산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지역에서 죽어갔다. 실제로 그들이 공산주의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와 권력의 정당성을 부정하거나, 이권 다툼이나 일상에서 사소한 감정대립을 하다 모함을 당해도 빨갱이로 몰렸다. 그렇게 수십만의 약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빨갱이로 몰려 가족, 친지, 이웃이 죽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입 한번 제대로 열지 못했고 슬픔을 위로받을 수 없었다. 아니 슬피 울 기회, 입을 열 기회조차도 없었다. 이 사회는 그들 삶의 모든 면을 부정했다. 아내들은 손가락질을 받고, 자식들은 취업이 힘겨웠다. 친구들과 친지들은 관계를 스스로 부정 할 수밖에 없었다. 빨갱이 이름표와 가깝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해도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음을 뜻했다. 최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여러 노력들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얼마 전 서울시청 앞 세월호 참사 추모 분향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파란 조끼 위에 서북청년단이라는 문구를 붙이고 노란리본을 철거하러 왔다. 노란리본을 철거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의 재건에 주목하게 되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대표적 우익 청년단으로 그들의 폭력성은 악명을 떨칠만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목표로 삼았는데, 재건하는 서북청년단의 첫 행동이 추모 분향소를 노렸다는 것은 참사를 추모하는 행위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어떤지 보여준다. 국가적인 목적을 위해 조직적인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되려 빨갱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며 마녀사냥에 앞장서는 이들이 아직 있다는 점에서 빨갱이 이름표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석기 인천인권영화제 소금활동가)

인권해설
거대한 모습의 일부만 드러난 ‘보도연맹 학살’의 진실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49년 6월 5일에 일제의 대화숙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 주로 좌익성향의 인사들을 가입시켰다고 하지만 지역별 할당제로 인해서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도 가입시켜 10대 청소년들마저 가입시켰다. 1949년 말에 30만 명이었다는 통계도 있으니 규모가 꽤나 큰 민간단체 형식을 띤 실제로는 관변 단체였다. 보도연맹원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은 게 아니라 실제로는 종종 소집당해 체벌을 당하면서 극단적인 반공교육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과 정치범들이 북한과 내응하
여 배신할 것을 우려하여 예비검속을 단행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대전교도소 3천여 명의 학살을 비롯해 인민군 미점령지였던 경상도 일대 지역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보도연맹원들을 강제소집한 국군은 그해 7월 말에서 8월 초에 일제히 이들을 학살했다. 경상도 일대의 산골짜기, 우물, 탄광 갱도에서 많이 학살했고, 경남 일원의 바다에 수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살은 육군특무대(CIC), 헌병, 경찰 등이 주로 했고, 서북청년단과 미군도 가담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대략 20만 명 전후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유족들이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을 개시하였고, 장면 정부는 위령제에 위로금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군부정권은 소급법을 만들어서 유족들을 빨갱이로 지목하여 요시찰 대상으로 지정하여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고통을 주었으며, 정부의 모든 기록을 소각하게 하여서 진상을 철저하게 은폐하려 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피해자와 가해자 조사, 유해 발굴 등을 전개했고, 울산보도연맹 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다. 이를 근거로 유족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우여곡절 끝에 2012년 국가배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정지된 뒤 국가에 의한 진실규명은 작업은 중단되어 있는 상태다.
진실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서 진실을 드러내고 기록하는 작업은 현재의 국가폭력의 원천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더 보기

매거진

내평점

평점 및 감상평 등록폼
평점입력 0점
평점 0 . 0
등록완료!
현재 입력 바이트 0 /입력 가능 바이트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