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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전기 (2010) I Wish I Knew, 上海傳奇 평점 6.0/10
상해전기 포스터
상해전기 (2010) I Wish I Knew, 上海傳奇 평점 6.0/10
장르|나라
다큐멘터리
중국
개봉 | 영화시간/타입/나라
2014.11.07 개봉
119분, 전체관람가
감독
(감독) 지아장커
주연
(주연) 자오 타오, 반적화, 한한
누적관객
17人의 소설같은 기억의 도시

상해 사람들을 통해 들어보는 중국 근현대사의 숨은 이야기!

급변하는 중국. 그중 최고의 항구 도시 상해(上海:상하이)에는 혁명가와 자본가, 정치가, 군인, 예술가, 조직폭력배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를 뒤흔든 혁명이나 정치적 암살은 물론, 아련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도 공존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승리 이후, 상해의 수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나는 상해를 떠나 홍콩이나 대만으로 가는 것으로 이는 곧 고향을 잃어야 함을 의미했다. 다른 하나는 상해에 남아 중국 문화혁명부터 시작된 정치적 재앙들을 묵묵히 견디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각각 세 도시-상하이, 타이베이, 홍콩-로 흩어져 살게 된 17명의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옛 상해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들의 경험들은 마치 17개의 챕터로 이뤄진 소설처럼 얽히고설켜 1930년대부터 2010년에 이르는 상해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야기는 영원히 변치 않고 방황하던 영혼 하나가 상해로 돌아와 황푸강 둑을 걸으며, 도시가 겪은 이 모든 변화의 스토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완성된다.

[ PRODUCTION NOTE ]

감독 제작노트

영화를 통해 10년 넘게 중국의 역사적 변화를 분석하다 보니, 자연스레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지금 중국이 직면하는 문제의 대부분이 중국이 겪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구체화된 결과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도 권력자들에 의해 중국 근현대사를 관통하여 발생한 각종 사건의 실체들이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마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고아처럼, 공식적으로 알려진 중국 근현대사 뒤에 무엇이 숨겨졌는지 알고 싶어졌다. 과연 당시 중국인들이 실제로 겪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상해로 갔고, 이어 대만이나 홍콩으로 떠난 옛 상해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상해는 중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과도 가깝게 연관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상해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중국 근현대사에 특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상해 사람들은 길고 고통스러운 이별과 삶을 떠안아야만 했다. 나는 ‘상해전기’가 정치적 성향-그것이 중국 공산당이든 대만 국민당이든-을 떠나 중국 사람들이 안고 있던 고통을 직접 어루만져줄 수 있기를 바랐다.
상해는 19세기에는 ‘식민지’였고 20세기에는 ‘혁명가들의 도시’이었다. 1946년 ‘해방’되었고 1966년 ‘문화혁명’을 거쳐 1978년에는 ‘개혁’과 1990년 푸등의 ‘개방’까지 상해의 역사는 복잡한 어휘들로 새겨져 왔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이런 추상적인 어휘가 아니라 그 배경에 감춰진 정쟁의 피해자들이요, 시간이 지나며 잊혀진 그들의 인생이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에 등장하여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차분하게 그들의 끔찍한 과거를 풀어가던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카메라에 담고 있던 것은 그들의 두 눈 속에서 반짝이는 ‘자유의 꿈’이었단 것을…


등장인물에 대하여

1. 천단칭

화가이자 작가인 천단칭은 1953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문화혁명 당시, 그는 상해를 떠나 장수성 북쪽의 한 마을에 안착하고, 혼자서 그림공부를 하여 중앙미술학원 유화과 입학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중국 최초 대학원생 중 한 명이 되었다. 1980년, 천단칭은 ‘티벳 그림 시리즈’로 유명해졌으며, 중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뛰어난 인물이 됐다.
천단칭은 1982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고, 2000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2. 양샤오포 (양싱포의 아들)
양샤오포는 1919년 양싱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33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4명의 총잡이들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1943년 양샤오포는 상해 푸단대 로스쿨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이어 1945년 12월부터 국민정부 교통부장관 산하의 상해 해양행정국에서 근무했고, 1949년부터는 CPPCC(중국 인민정치자문기구회의) 전국위원회와 KMT(대만 국민당) 혁명위원회 산하 상해지방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및 상해 지방 인민정부 상담역을 지냈다.

☞ 관련인물: 양싱포
양싱포(1893년-1933년 6월18일)
양싱포는 장쑤성 칭장 태생으로 경제관리 학자였다. 중국 인권운동의 선구자로 1910년 중국혁명동맹에 가입했고, 1912년 1월 쑨원(孫文:손문)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부임하자, 난징에서 대총통 비서실 문서국 관리자로 재직했다.
쑨윈 사임 후, 미국으로 건너간 양싱포는 코넬대에서 공부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1924년에는 광저우에서 쑨원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1925년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28년 4월 양싱포는 중앙연구원 원장으로 임명되고 1932년 12월에는 중국시민평등권연맹 준비위원회 위원장 및 집행위원으로 지명됐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운동 참여와 CPC 멤버 및 민주주의옹호자들의 구제를 진행하면서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정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1933년 6월18일 그는 아들 양샤오포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상해 야에페이 거리를 지나던 중 KMT 스파이들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3. 장위엔순 (장이윈의 손자)
장위엔순은 1930년 ‘인공조미료의 왕’ 장이윈의 손자이다.

☞ 관련인물: 장이윈
장이윈(1871-1933)은 중국 저장성 전하이 태생이다. 1890년 청왕조 11대 광서 황제의 재임시절, 열아홉 살로 지역 궁중 과거에 합격했다. 그 뒤, 장이윈은 그의 가족이 운영하던 상해의 인공조미료제조공장을 맡게 된다. 1923년 조미료 연구원 우옌추와 합작해 ‘텐추’ 인공조미료공장을 설립하고 동시에 ‘Foshou Brand' 인공조미료를 출시했다. 훗날 그것들은 중국시장을 잡고 있던 일본의 독점상품 ’아지노모토‘를 물리쳤고, 국내 및 해외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 뒤로도 장이윈과 우예추는 수입 원자재의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작으로 텐원 화학공장과 텐리 니트로겐 공장, 그리고 텐 화학기업그룹과 함께 다른 회사들을 세워갔다.
1932년 1월28일 상해사변이 터지자, 그는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 지원물품으로 비행기 2대, 전투기 1대, 10만 위안어치의 훈련화를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텐추 인공조미료는 1926년 미국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와 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4. 두메이루 (두웨성의 딸)
두메이루는 1930년 상해에서 두웨성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949년 아버지를 따라서 홍콩으로 이사했고, 이어 1954년 대만으로 건너갔다. 1969년 요르단으로 떠난 그녀는 현재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 관련인물: 두웨성
두웨성(1888-1951)은 상해 푸둥 가오차오 태생이다. 그는 근대 상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범죄조직 ‘청방’의 일원이었다. 두웨성은 황친중, 장샤오린과 함께 ‘상해 3대 거물’로 알려졌다. 1925년, 그들은 프랑스조계지 행정국(French Concession Administration)에 거금을 공급하기 위한 마약 배급회사 ‘싼신(Sanxin)’을 세웠고, 두웨성이 프랑스조계지 연합 상공회의소 회장과 중국납세자연맹 감독관으로 지명되었다. 1927년 4월12일 KMT혁명 후, 장제스는 두웨성을 군 총사령관 고문, 군사위원회 선임참모(소장급) 등으로 임명했고, 1929년에는 ‘중휘(Zhonghui)은행’ 행장이 되었다. 그는 KTM 비밀경찰 지도자 다이리의 지원으로 1933년 다얀회사를 창립했다. 1934년 그는 상해지역협회 회장으로 지명됐다. 반일전쟁 중에 그는 반일협회 상임간부회와 기금위원회 상해지역 회원으로 활동했다. 상해 몰락 적전에 홍콩으로 옮긴 그는 적십자사 부총재와 구호위원회 상임위원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두웨성은 충칭으로 거처를 옮기고, 적진 후방에서 반일활동에 들어갔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상해상원의 대변인으로 뽑혔다. 그는 상해의 무역, 재정, 수송, 문화, 교육, 그리고 언론 분야에서 회장, 사장, 전무이사, 이사 및 관리자 등 60여 개의 사회적 직함을 얻었다. 1948년 8월, 그는 상해산업협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이듬해인 1949년, 상해해방운동 전야에 홍콩으로 갔다.


5. 왕페이민 (왕샤오허의 딸)
왕페이민은 1948년 지하 중국 사회주의당 당원 왕샤오허의 둘째딸로 상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상해연감발행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데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 관련인물: 왕샤오허
상해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왕샤오허(1924-1948)는 상해 리치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어 1943년부터 미생 상해 전기회사에서 근무하는 와중에 1946년 1월 상해 전기회사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왕샤오허는 활발하게 파업운동을 주도했으며, 상해전기회사 노동조합 임원으로 선출됐다. 1948년 4월21일, 그는 KMT 헌병한테 체포됐고, 그 해 9월30일 상해 티란챠오 감옥 사형장에서 총살당했다.


6. 왕퉁 (왕종리엔의 아들)
왕퉁은 1942년생이다. 1949년 가족과 함께 상해에서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최고의 영화감독이 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바다를 보기 위한 날들(Days to see the sea)’, ‘허수아비(Scarecrow)’, ‘바나나 천국(Banana Paradise)’, ‘조용한 언덕(Silent Hill)’, ‘붉은 감(Red Persimmon)’ 등이 있다.

☞ 관련인물: 왕종리엔
왕종리엔(1903-1991)은 안후이성 샤오 출신으로 1924년 봄 황푸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반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제85군사령관으로 지명됐고, 1939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어 육군 제31군단 부사령관, 제2 소노방 부대 사령관, 장쑤성 보안사 책임자, 안후이성 제4지구 상임집행위원, 안후이성 보안사령관, 육군 제19군단 사령관, 장쑤성 정부위원회 회원, 쉬저우 행정국 책임자, 육군 제31군단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6년에는 육군 제26군단 사령관과 육군 제31군단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47년 겨울내전 당시, 왕종리엔은 인민혁명부대와 맞서 싸우던 중에 KMT 요원한테 체포됐다. 얼마 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그는 집에서 조용한 생활을 했다. 1949년, 그는 대만으로 건너가 ‘젱첸 회고록’을 집필했다.


7. 리자통
1939년 상해에서 태어난 리자통은 1961년 대만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UC 버클리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1967년에는 역시 UC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대만 칭화대 총장대리로 근무했고, 프로비덴스대와 치난대의 총장을 맡았다. 그리고 치난대에서 정보공학 및 정보경영학 교수로 활약했다.
리자통은 2009년 대만 정부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현재는 대만 칭화대 교수로 있다.


8. 장신이 (증궈판의 증손녀, 니에지귀의 손녀, 장치후앙의 딸)
장신이는 1916년 상해 태생의 유명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전 대만정부 재무장관 페이화의 부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1935년, 그녀는 옌칭대에 입학했으나, 상해 후지앙대로 옮겨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중국이 일본군과 싸워서 승리한 후, 그녀는 주간지 ‘뉴스 세계(News World)’와 잡지 ‘봄과 가을(Spring and Autumn)’을 창간하고,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그녀는 이어 원난성 '시민저널(Journal of Civilians)’의 사장, 방콕 ‘일간 민주(Democratic Daily)’의 회장, 그리고 홍콩 ‘일간 중앙(Central Daily)’의 회장 등을 맡았다. ‘북부 군벌의 역사(A History of Northern Warlords)’를 집필했으며, ‘링컨전기(Lincoln's Biography)’, '린덴(Linden)’, '좋은 아버지(Wonderful Father)’ 등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 관련인물: 증궈판
증궈판(1811-1872)은 후난성 창사 샹강에서 태어났고, 청 왕조의 군사전략가, 철학자, 정치인, 달필가, 작가였다. 또한 그는 시앙군 창설자이며 사령관이기도 했다. 그는 롄장 총독, 즈리 총독, 우잉궁 학자, 그리고 이용 후작 등으로 지명됐다.
증궈판은 대북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청 왕조를 부흥시키기 위해 시앙군을 일으켰다. 그는 대북 반란군과 거의 20년 동안 싸웠고, 자신의 인생 절정기에 대북 반란군과 싸워 최후 승리를 거뒀다.
증궈판은 청 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동시 위기를 맞아 고전하던 혼란기에 살았지만 그는 형세를 역전시켰고 ‘통치중흥’의 출현에 기여했다. 그래서 근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나면서도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유교 중심으로 전통적인 중국 문화 관점을 계승한 증궈판은 중국과 서양문화를 결합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서양문물 수입하되 중국방식으로 운용하자는 주의)’을 지지했다. 그는 중국의 첫 번째 근대 ’서구화운동‘의 지도자이자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 관련인물: 장치후앙
장치후앙(1877-1972)은 광시성 융푸현 출신으로, 1904년(광서제 30년) 최고수준의 궁중과거인 ‘금방’에서 합격했다.
1920년 군벌 간에 벌어진 혼란스러운 충돌 중, 우페이푸 장군 밑에서 서기장으로 일했다. 1926년 10월, 북부 파견군대가 동부의 후베이성 우한을 점령한 우페이푸의 주력군이 파멸되자, 그는 우페이푸와 함께 허난성 정저우로 피신했다. 1927년 6월에는 허난성 신예로 도망갔지만, 지역 레드건팀에 의해 사살됐다.


9. 호우샤오시엔
호우샤오시엔은 1947년 광동성 메이현에서 태어났으며, 1947년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는 대만 영화계의 젊은 세대한테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The Boy from Fengkui)’, '동동의 여름방학(A Summer at Grandpa's)’, '동년왕사(A Time to Live, A Time to Die)’, '연연풍진(Dust in the Wind)’, '비정성시(A City of Sadness)’, '희몽인생(The Puppetmaster)’, '남국재견, 남국(Goodby South, Goodby)’, '카페 뤼미에르(Cafe Lumiere)’, ‘빨간 풍선(The Fight of the Red Balloon)’ 등이 있다.
1998년, 호우샤오시엔은 상해출신 작가 한방칭의 소설 ‘상해의 노래 부르는 소녀들(The Sing-Song Girls of Shanghai)’을 ‘해상화(Flowers of Shanghai)’라고 개명해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 내용은 봉건적인 윤리에 깊이 사로잡힌 남자와 중국인과 외국인이 함께 모여 사는 상해 영국조계지에 위치한 고급사창가 창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담고있다.


10. 주치엔성(영화 ‘중국(China, Chung Kuo,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1972년)’의 상해 스태프)
1942년 구이저우성에서 태생인 주치엔성은 상해 TV 기자였다. 그는 1988년 ‘상해 10대기자’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됐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1972년에 연출한 영화 ‘중국’의 상해 스태프로 활동했다.

☞ 관련인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1912-2007)는 이탈리아 영화감독으로1940년대 이탈리아 신사실주의(Neo-realism)의 개척자였다.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모험(L'avventura)’, ‘야간(Night)’, '붉은 사막(Red Desert)’,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 Point)’, '일식(Eclipse)’, ‘줌(Zoom)’, ‘직업: 기자(Profession: Reporter)’, '구름 저편에(Beyond The Clouds)’ 등이 있다.
1972년, 그는 중국 인민공화국 초청을 받고, 중국에서 자신의 다큐멘터리 ‘중국’을 촬영했다. 하지만 훗날 중국 문화 대혁명을 주도한 과격파 4인방은 이 영화를 ‘반중국적’이며 ‘반공산당적’인 작품이라며 강하게 규탄하고, 국가적인 반대운동을 벌렸다.


11. 황바오메이
황바오메이는 1931년 상해 태생이다. 그녀는 상해 제17 면직공장 노동자였다. 그녀는 상해 모범노동자, 국립섬유산업 모범노동자, 중국 모범노동자 등 7차례나 각종 상을 받았다. 황바오메이는 국제회의에 세 차례 참석했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다른 지도자들을 여덟 번 만났다. 1958년, 영화감독 시에진은 주요인물로 황바오메이와 함께 그녀의 다큐멘터리 ‘황바오메이’를 연출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7살이었다.


12. 웨이란 (상관윈주의 아들)
웨이란은 1951년 상해에서 여배우 상관윈주와 세 번째 남편 청수야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화를 공부했으며, 상해 비즈니스업무를 다룬 중국 건설업계 회보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 관련인물: 상관윈주
상관윈주(1920-1968)는 가장 유명한 중국 여배우 중의 한 명으로 장쑤성 장인 출신이다. 1937년, 그녀는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탈출해 상해에 도착했다. 1940년, 상해 화광연극학교에 입학했으며, 신화영화사 배우와 여배우 연수반에서 공부했으며 이듬해인 1951년 연극 ‘뇌우(Thunderstorm)’를 통해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후에 영화계로 옮겨 ‘봄의 강은 동쪽으로 흐른다(A Spring River Flows East)’, ‘수많은 불빛(Myriads of Lights)’, ‘귀가 전의 두 잔(Two for the road)’, '까마귀와 참새(Crows and Sparrows)’, '2월의 초봄(Early Spring in February)’, ‘무대자매(Two Stage Sisters)’ 등 최고수준의 영화 여러 편에 출연했다. 특히 1952년 '까마귀와 참새‘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관람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문화혁명’ 중 박해를 당하면서, 1968년 11월23일 3시 자살했다.


13. 웨이웨이
웨이웨이는 1928년 광둥성 중산현 출신으로 페이무 감독이 연출한 중국 고전영화 ‘작은 마을의 봄’에서 저우웬 역으로 나왔다. 그녀는 상해에서 자라고 공부했고 1941년 상해 연극무대에서 여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웨이웨이는 1947년 영화계로 진출했으며, ‘나이트클럽(Nightclub)’이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1948년, 그녀는 ‘작은 마을의 봄’에 출연했으며, 그 해 홍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51년 이후, 그녀는 ‘대지의 아들들(Sons of the Earth)’, '1년 계획(A year's Plan)’, ’자매 노래(Sister Song)’, '한 유부녀의 비밀(A Married Woman's Secret)’ 등에 출연했다.
웨이웨이는 1960년 공식활동을 접었다.


14. 페이밍이 (페이무의 딸)
페이밍이는 홍콩의 유명 소프라노이다. 그녀는 유명 영화감독 페이무의 딸이자, 홍콩 일간지 ‘타 쿵 파오(Ta Kung Pao)’ 사장 페이이민의 조카이다. 그녀는 1949년 가족과 함께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이사했다. 이듬해인 1950년 그녀는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더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까지 떠났다. 1960년 홍콩으로 돌아온 그녀는 솔로콘서트를 여러 차례 열었으며, 성악교사로 경력도 쌓아갔다.

☞ 관련인물: 페이무
중국 영화감독 페이무(1906-1951)는 상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시티 나이트(City Night)’, '향긋한 눈의 바다(Sea of Fragrant Snow)’, '가족(Family)’, '늑대산의 유혈사태(Bloodshed on the Wolf Mountain)’, '공자’(Confucius)’ 등이 있다.
1947년, 그는 중국 최고의 경극배우 매란방이 주연한 중국 첫 컬러영화 ‘사망 시의 회한(Remorse at Death)’의 메가폰을 잡았다. 1948년에는 중국최초 서정적 영화의 전형이 된 ‘작은 마을의 봄(Spring in a Small Town)’을 연출하기도 했다. 페이무의 ‘작은 마을의 봄’은 1980년대 말 중국 영화비평가들에 발견됐고, 그의 예술적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그 영화는 ‘중국 영화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란 평과 ‘1930년대와 1940년대 사이에 중국 영화의 미학적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일컬어지며 인정받았다. 영화감독으로서 페이무의 중요성은 전통적인 중국 미학과 현대 영상언어의 완벽한 결합을 연출해냈다는 점에 있다. 페이무는 1949년 5월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했고, 1951년 세상을 떴다.


15. 판디화
판디화는 가수이자 배우이다. 1931년 상해에서 태어났고, 1949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홍콩으로 이사를 했다. 1960년대 한 나이트클럽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지만, 훗날 홍콩 최초로 세계적인 영국음반회사 EMI와 계약한 가수가 되었다.
판디화는 가끔 왕자웨이(王家卫: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상해여인으로 출연한다. 그녀는 왕자웨이 감독의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에 출연해 제36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녀는 ‘상해의 사랑과 꽃들에 빠져서(In the Mood for Love and Flowers of Shanghai)’에도 출연했다.


16. 양화이딩
양화이딩은 1950년 상해 태생으로 별명이 ‘백만장자 양’이다. 원래 상해 합금철 공장 노동자였던 그는, 1988년 생애 첫 채권 거래를 통해 대박을 터트렸고, 상해 최고 증권 투자가가 됐다. 이후 상해 주식시장의 거물이 됐다. 이런 그의 이야기는 ‘타임’, ‘뉴스위크’ 등 세계적인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17. 한한
한한은 1982년 상해에서 태어난 작가 겸 카레이서이다. 1988년에 ‘신개념’ 수필 콘테스트에서 첫 수상을 했다. 1999년에는 소설 ‘삼중문(Triple Door)’을 발표했는데, 후에 190만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한한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 두고, 프로 경주용 자동차 선수가 됐다. 그는 2007 차이나 서킷 챔피언십과 2009 차이나 랠리 챔피언십(그룹 N 챔피언십)에서 개인선수권을 차지했다.
한한의 블로그는 중국어로 된 블로그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사회현상과 시사 등을 언급한 글을 많이 올렸으며, 공공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0년, 그는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100인’에서 24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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