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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속으로 (2010) 71-Into the Fire 평점 5.7/10
포화속으로 포스터
포화속으로 (2010) 71-Into the Fire 평점 5.7/10
장르|나라
전쟁
한국
개봉 | 영화시간/타입/나라
2010.06.16 개봉
120분, 12세이상관람가
감독
(감독) 이재한
주연
(주연) 차승원, 권상우, T.O.P, 김승우
누적관객
6월, 그들을 기억하라!

낙동강 사수를 위한 최후전선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도, 고향도, 조국도 사라진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 전쟁이 시작된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하고, 남한군의 패색은 짙어져만 간다. 전 세계가 제 3차대전의 공포에 휩싸이자 UN은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다. 이미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측은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남은 전력을 그곳으로 총집결 시킨다.

“지금부터 이곳은 학도병 제군들이 맡는다. 우리 3사단은 낙동강전선에 투입된다.”
“우리보고 여를 지키라는 겁니까? 우리끼리만요?”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이제 전선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는 상황. 강석대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장범(최승현-T.O.P)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지만,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한다. 총알 한 발씩을 쏴보는 것으로 사격 훈련을 마친 71명의 소년들은 군인들이 모두 떠난 포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석대의 부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부산은 이 박무랑이가 제일 먼저 접수합네다. 766은 포항으로 진격한다!”
영덕을 초토화 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766 유격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당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영덕에서 포항을 거쳐 최단 시간 내에 최후의 목적지인 부산을 함락시키겠다는 전략. 박무랑의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입성하고, 국군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남아있던 71명의 소년들은 한밤중 암흑 속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 고요함이 감돌던 포항에는 이제 거대한 전운이 덮쳐 오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강석대 대위는 학도병들을 걱정할 틈도 없이 시시각각 모여드는 인민군 부대와 맞서야 하는데…

[ About Movie ]

포화속으로 뛰어든 71명 학도병의 감동 실화
60년간 잊혀졌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살아난다!

2010년은 6.25 발발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지만 한국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터의 포화속으로 뛰어들어 거대한 전쟁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71명 학도병의 실화를 그린 <포화속으로>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영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재한 감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영화를 완성했다”라고 밝혔듯, <포화속으로>가 60년간 잊혀졌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살려 내는 뜻 깊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포화속으로>를 통해 되살아난 학도병 71명의 슬프고도 위대한 전투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어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는 포항전투가 있었던 8월 11일, 71명의 학도병 중 한 명이었던 이우근 학생이 쓴 것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열 여섯 소년의 편지에는 난생 처음 사람을 죽이고 느끼는 충격과 슬픔, 이길 수 없는 적을 향한 두려움과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가 가슴 절절하게 녹아있다. “어머니, 전쟁을 왜 해야 하나요?”라는 소년의 물음에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이우근 학도병은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편지 역시 후일 시신을 수습하던 생존 학도병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학도병의 눈을 통해 본 전쟁의 참상,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의 눈에 비친 전쟁의 끔찍함은 <포화속으로>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차승원, 권상우, 최승현(T.O.P), 김승우, 사상 최강의 캐스팅!
자신의 전부를 건 네 남자의 카리스마 전쟁이 펼쳐진다!

차승원, 권상우, 최승현(T.O.P), 김승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남자 배우들이 <포화속으로>를 위해 뭉쳤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제작되는 전쟁 대작, 113억의 총제작비가 투입된 <포화속으로>에 걸맞는 사상 최강의 캐스팅이 이뤄진 것. “전쟁물은 남자 배우에게 최고의 경험”이라고 밝힌 카리스마 지존 차승원, “<포화속으로>는 핵폭탄 같은 영화”라며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권상우, “이 작품에 목숨을 걸었다”는 다부진 각오로 엄청난 성장을 경험한 최승현(T.O.P), “<포화속으로>에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다”며 맏형으로서 현장을 이끌며 작품의 의미를 되새긴 김승우까지. 12월 1일 촬영을 시작해 경상남도 합천에서 5개월 가까이 합숙하며 사상 최악의 강추위를 녹인 네 배우의 전부를 건 열연은 <포화속으로>를 기대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국민드라마 <아이리스> 제작진의 새로운 도전
<태극기 휘날리며>의 뒤를 잇는 전쟁 스펙터클을 기대하라!

<포화속으로>는 한국 드라마 역사의 새 장을 열며 2009년 ‘국민드라마’로 등극한 <아이리스>의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새롭게 선보이는 야심작이다. 2003년 개봉해 최단 기간 안에 천 만 관객을 돌파한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자취를 감췄던 전쟁 블록버스터를 한국전쟁이 60주년을 맞이하는 2010년 6월, 극장가에 부활시키는 것이다. <아이리스>에서 쌓은 대규모 폭파씬과 전투씬 촬영의 다양한 노하우는 탁월한 영상미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이재한 감독의 연출과 만나 빛을 발한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는 단순한 액션이 아닌, 인물의 감정과 정서가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공존하는 <포화속으로>의 전쟁씬들은 관객들에게 대형 스크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각적 쾌감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칸 영화제 4개국 선판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초청 공식 상영회
이제 세계가 <포화속으로>를 주목한다!

지난 5월 17일 개막한 프랑스 칸느 영화제 마켓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포화속으로>였다. 12분 분량의 프로모션 상영회에는 미국 파라마운트, 키노, 매그놀리아, 일본 가가, 도에이, 아뮤즈 등 세계 각국 주요 바이어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상영회 전 구매를 확정한 영국, 독일에 이어 계약을 체결한 싱가폴, 러시아뿐 아니라 수 십 개국 바이어들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이 쏟아진 것. 칸느에서 ‘기존 한국의 전쟁 영화들과 달리 글로벌한 감성과 상업성을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포화속으로>는 스탠포드 대학의 초청으로 5월 27일 미국에서 공식 상영회를 갖는다. 스탠포드 대학의 상영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전쟁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후 2년만. 세계적인 영화제들이 한국 영화를 주목하고 있지만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는 한국 영화가 후보에 오른 적 조차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포화속으로>에 쏟아지는 이 같은 관심은 세계 무대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 About Korean War ]

한국전쟁 주요 사건 일지


1950년 06월 25일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
1950년 06월 27일 대한민국 임시 수도 대전으로 이전
1950년 06월 28일 북한군 서울 점령
1950년 07월 07일 16개국이 참여한 UN 연합군 결성
1950년 07월 08일 대한민국 임시 수도 대구로 이전
1950년 07월 19일 북한군 대전 점령
1950년 08월 11일 포항전투
1950년 08월 18일 대한민국 임시 수도 부산으로 이전
1950년 08월 31일 북한군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
1950년 09월 15일 맥아더 장군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09월 28일 연합군 서울 수복
1950년 10월 19일 연합군 평양 탈환
1950년 12월 14일 중국군 참전으로 연합군 평양 철수
1951년 01월 04일 연합군 서울에서 후퇴

1.4 후퇴 이후 연합군은 3월 14일 다시 서울 수복에 성공하였으나 이후 소련이 북측에 가담하면서 세계 제 3차 대전 발발이 점쳐졌다. 1951년 7월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전회담이 개시되었고,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 후 소련이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연이어 북한이 휴전을 제안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정협정이 체결되어 현재까지 그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사망자 수는 2백만 명에 이르며, 한국측 사망자의 85%가 민간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Wikipedia, 두산백과사전,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낙동강 전승기념관 웹사이트


낙동강 전투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고 밀릴 수도 없는 마지막 방어선,
낙동강이 뚫리면 끝이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손에 넣은 북한군은 낙동강 근처까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한다. 낙동강이 뚫리면 부산을 지켜낼 수 없는 상황. 남한군은 낙동강 사수를 위해 8월 1일 낙동강 교두보의 구축명령을 내리고, 8월 3일부터 의성, 마산, 영산, 안강, 포항, 왜관 등 경상북도 일대에서 낙동강 지지선을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화속으로>는 남한의 마지막 대동맥을 끊기 위해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결집하고 있던 그때, 낙동강과 포항 일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를 그린 전쟁실화다. 비록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1950년 8월, ‘피바다’로 불린 그곳에서 싸웠던 이들에게 그것은 전부를 건 마지막 전투였다.


포항여중 전투

“포항을 버리자는 겁니까?”
“그럴 순 없다. 포항이 뚫리면 낙동강 전선은 앞뒤로 포위된다.”
“그럼 어느 부대가 포항을 맡습니까?”


1950년 8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포항에는 수 백 명의 남한군 정규 병력과 함께 비무장 병력인 학도병 71명이 대기 중이었다. 당시 학도병들은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자신들이 따르던 정규군 장교를 따라 포항으로 향한 것이었다. 전력 면에서 열세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진격 정보를 알지 못한 포항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1950년 8월 11일
북한의 766유격부대가 포항을 기습했을 당시, 포항여중에는 학도병 71명만이 남아있었다. 학도병 1인에게 지급된 무기는 M1소총 한 자루와 실탄 250발이 전부. 북한군의 엄청난 화력에 맞서 11시간 반 동안 총 4차례의 교전을 벌인 그들은 실탄이 떨어지자 적이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는 혈전을 펼쳤다. 이 전투로 북한군 6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학도병 48명이 꽃다운 젊은 목숨을 잃었다. 포항에서 낙동강까지는 2시간 거리.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킨 11시간 반 동안 2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형산강 이남으로 대피했으며 이는 낙동강 사수는 물론 이어진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 속 학도병

“비겁하게 나만 집에 있을 수 있나? 친구들이 다 싸우다 죽었는데.”


전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학도병’은 전쟁에 참여한 학생 군인, ‘학도의용군’을 칭하는 말이다. 불과 60년 전인 1950년대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이상의 학력만 가져도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시절. 그렇기에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여겨졌었고, 이는 전쟁 발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정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어린 학생들의 참전을 극구 만류했지만 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학교를 떠나 전쟁터의 한 복판에 섰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은 어린 소년부터 대학생은 물론 귀국한 유학생, 여학생들까지 다양했다. 낙동강 전투가 있었던 경상북도에서 희생된 55개교 286명을 비롯, 한국전쟁 중에 희생된 학도병의 수는 근 3천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군번도 없고 소속도 없었기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포화속으로 사라져간 학도병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60년간 잊혀졌던 학도병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던 제작진은 학도병 전원을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이들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전쟁 실화의 주인공으로 60년간 잊혀졌던,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써 나갈 것이다.

* 참고 문헌 : 한국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생존자들이 전하는 그날의 기억
- 포항전투 생존자 김만규(당시 15세), 손주형(당시 17세) –

한국전쟁 당시 71명의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은 60년이 지난 오늘 현대적인 건물과 녹음이 우거진 교정으로 변모해있다. 교문 바로 앞, 전사한 48명의 학도병들이 처음 묻혔던 자리에 세워진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만이 유일하게 60년 전 그날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매해 8월 11일 그곳을 다시 찾는 포항전투 생존자들은 아직도 그날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8월 11일 전투 당시의 상황

김만규
(학도병들이)포항에 온 것이 1950년 8월 9일입니다. 오천 비행장에 가서 무기를 지급 받은 것은 8월 10일 오후고, 포항여중 강당에서 실탄 250발씩을 받아 가지고 잠이 들은 것이 새벽 1시쯤 됐습니다. 새벽 3시쯤 시내에서 딱꿍, 따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때 학교에는 우리 71명 밖에 없었습니다. 중대장이 1소대 2소대 나누어서 학교 울타리에 배치를 시켰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쏘기 전에는 총을 쏘지 마라’ 그랬지요. 보니까 엄청난 수의 괴뢰군이 몰려옵니다. 눈에 불이 나서 총을 쐈지요. 괴뢰군들이 ‘동무, 후퇴하기요’라고 하고 물러가더니 몇 분 후에 다시 진격해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총을 쏘고 다시 후퇴를 하더니 위로는 영덕 가는 철로변까지 점령해서 총을 쏘고 아래서도 총을 쏘며 우리를 포위 했어요. 4차전 때는 뒤에서는 박격포를 때리고 앞에서는 기관총과 따발총을 엄청나게 쏘면서 점점 협공을 해오는데 마지막에는 내 30m 앞까지 와서 수류탄방망이를 던졌습니다. 총알은 다 떨어졌고 그 수류탄방망이를 도로 (북한군한테) 던지든지 아니면 터져서 죽든지 둘 중 하나인 전투였습니다. 저는 그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서 열흘 간 잡혀있다 총살 직전에 겨우 탈출했습니다. 나머지 포로들은 신고산에서 다 총살당했고요.

손주형 북한 입장에서는 남쪽의 신경을 낙동강으로 집중시킨 와중에 포항에 766부대를 보내서 바로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거죠. 총 한 발 안 쏘고 포항에 들어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우리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고, 그러다 우리한테 당한거죠. 우리가 11시간 반을 버텼으니 아군한테는 그 만큼 여유가 생긴 겁니다. 저는 싸우다 바위가 와서 쿵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밑이 훈훈해서 보니까 피가 흠뻑 묻었어요. 총에 맞은 거죠. 거기서 기절을 했는지 눈을 떠보니 경주 야전병원이었습니다.


학도병에 자원했을 때의 이야기

김만규
대구가 고향인데, 그때 열 다섯이었습니다. 키가 M1 소총보다 한 뼘 큰 정도였어요. ‘나이가 어리다, 안 된다’ 그래서 열 여덟이라고 나이를 속였습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반대를 했습니다만 친구 집에 숨어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입대 했습니다.

손주형 저는 중학교 4학년,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열 일곱이었습니다. 서울이 집이었는데 저만 먼저 피난을 나왔어요. 기차 지붕에도 타고 그렇게 대구까지 와서 며칠 간 거지생활을 하다 지원을 했습니다. 집에서는 제가 군대 간다는 것은 몰랐지요.


60년이 지난 포항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만규
학교건물은 리모델링 한 것 같습니다만 강당 위치는 그대로입니다. 그때는 담이나 철로 된 교문이 없고 우리가 싸우던 울타리는 나무였습니다. 동네가 많이 변했습니다. 동쪽이 과수원이었고 그 외는 민가도 없고 전부 논두렁이었습니다. 당시 포항은 전부 폭격을 맞아서 포항제일교회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빈터였어요.

손주형 당시 학교는 2층 건물이었어요. 저 강당에서 그날 밤 저희가 자고 있었고 저 울타리 아래에서 제가 총을 맞았습니다. 매년 8월 11일만 되면 이곳에 와서 추모행사에 참여하고 올라갑니다. 지금도 저기서 동료들 48구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살아서 매년 여기에 오는데, 우리 친구들은 먼저 갔구나 하는 마음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눈감으면 같이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내 동료들은 갔구나…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우근 학도병에 대한 기억

김만규
이우근은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활달하고 키가 크고 아주 명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투 전에 일지를 쓰고 죽기까지 일지를 썼어요. 그런 일지를 쓰고 있는지 그때는 몰랐지요. 열흘 후쯤 가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을 했는데. 이우근이 옷 속에서 작은 수첩을 발견했어요. 그 당시에 수류탄을 맞아서 산화하고 (여름인데) 시체가 열흘 이상 내버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우근은 그 수첩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가 알려지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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