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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평양 시민 (2006) Crossing the Line 평점 7.2/10
푸른 눈의 평양 시민 포스터
푸른 눈의 평양 시민 (2006) Crossing the Line 평점 7.2/10
장르|나라
다큐멘터리/드라마
영국, 북한
개봉 | 영화시간/타입/나라
2007.08.23 개봉
94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감독) 다니엘 고든
누적관객
1962년 38선을 넘은 미군병사, 평양의 인기스타가 되다?!

1962년, 38선을 넘어 북으로 떠난 미군 병사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2007년, 영화 배우로 변신, 평양의 인기 스타 아서 선생이 되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2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남북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DMZ(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다. 순찰을 돌던 미군 병사 드레스녹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망명해버린 것이다. 다른 미군 망명자들과 함께 드레스녹은 ‘돌아갈 수 없다면, 평양 사람으로 살아가자!’고 결심하고, 북한 사람들의 말과 글을 배우고, 사상과 생활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 영화 배우로 변신, 인기 스타로 떠오른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북으로 떠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아직도 평양에 살고 있을까?
세상을 놀라게 할 진실과 비밀들이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서 공개된다.

[ Hot Issue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북쪽 이야기!
대니얼 고든 감독, 북한 다큐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다!

1966년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 진출에 성공하는 이변을 일으켰던 북한 축구선수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 The Game Of Their Lives>(2002)과 세계 최고로 꼽히는 북한의 매스게임에 참여한 두 중학생 소녀, 현순과 송연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 A State Of Mind>(2004)로 북한의 새로운 면면을 세상에 알렸던 대니얼 고든 감독이 북한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작품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들고 돌아왔다.

전작들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북쪽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던 대니얼 감독은 이번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소재인 미군 망명자 사건을 이야기한다. 대니얼 고든 감독의 북한 삼부작, 그 대미를 장식할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기획부터 완성까지 6년의 세월이 걸린 이번 영화는 1960년대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미군 망명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심층 취재하여 구성한 빅 프로젝트로 오는 8월 23일, 드디어 관객들을 만난다.


2006 부산국제영화제 예매 오픈과 함께 완전 매진!
2007 선댄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 상영!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 선을 보였던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 대한 평단과 관객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예매가 열리자마자 전 상영 일정이 모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운 것, 게다가 상영 당일에는 ID용 좌석까지 매진돼 상영관 계단까지 관객들로 가득 차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이미 두 편의 북한 다큐를 선보였던 대니얼 고든 감독에 대한 신뢰와 ‘냉전 시대,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미군 병사들’이라는 소재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은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영화가 공개되면서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재미있는 다큐’,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냉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07년 선댄스영화제 월드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출품된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미국 CBS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은 영화의 장면을 소개하며 북한에 남아 있는 마지막 미군 망명자 드레스녹의 인터뷰를 먼저 공개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또한 영국 BBC 방송 등 전세계 유수의 매체들은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앞다투어 다루며 개인사를 통해 희대의 역사적 사건을 조명한 이 영화에 관심을 보였다.




[ About Movie ]

1962년, 38선을 넘어 북으로 망명한 네 명의 미군 병사가 있었다.
대니얼 고든 감독, 미군 망명자 사건과 그 이후를 카메라에 담다.

“새로운 삶을 찾아 건너갔어”

1962년, 미군 병사 하나가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남북한의 경계를 이루는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의 망명이 계속 이어지면서 도합 네 명의 미군 병사가 북한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애정 문제에 따른 개인의 돌발적인 일탈 행위로 치부, 수십여 년 동안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건을 은폐해왔다.

“난 당신들을 믿소, 진실을 찾아온 거니까”
북한에 미국인, 그것도 미군 병사가 망명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대니얼 고든 감독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드라마틱한 소재에 매료되어 작품으로 만들고자 작업에 착수한다. 기존 작품들을 통해 북한 정부에 신임을 얻고 있었던 덕분에 불가능할 것으로만 여겨졌던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조금씩 진척됐고, 2004년 4월, 드디어 대니얼 고든은 북한에 살고 있는 두 명의 망명자 드레스녹과 젠킨스와 촬영을 시작했다.


정치 선전용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배우로 변신!
네 명의 미군 병사들, 평양의 인기 스타로 떠오르다?!

“8,9부대여! 북으로 오라.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북한에 도착한 드레스녹 일병은 평양에 도착, 이미 월북해 있던 앱셔를 만난다. 그들은 곧 정치 선전을 위해 투입되게 되는데, 보다 효과적인 선전을 위해 북한은 두 망명자의 목소리를 통한 대남 방송 외에도 <행운아들>이라는 제목의 선전물을 발간, 망명한 미군 병사들의 즐거운 생활을 보여주는 사진과 글로 남한의 미군 병사들을 선동했다. 이듬해(1963년) 세 번째로 패리쉬가 DMZ을 건너오면서 북한의 미군 탈영병은 셋이 됐고, 65년 장교 젠킨스가 군을 이탈, 망명해 오면서 도합 네 명의 미국인이 북한에 체류하게 된다.

“난 선전 영화라고 생각 안 해, 영화에 참여해 큰 영광이었지”
이들은 정치 선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동원됐다. 특히 그들이 가장 큰 활약을 벌였던 분야는 영화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은 영화를 통한 사상 교육과 정치 선전 등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제작한 영화가 바로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첩보 시리즈물이다. 네 미군 망명자들은 각자 이 영화에서 서양인 악당 역으로 출연했는데 시리즈의 인기가 올라가자 네 미군 망명자들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망명 당시 평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주시하는 북한 사람들의 시선에 괴리감을 느꼈던 망명자들은 영화 배우로 활동하고 인기 스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평양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북한 사회에 적응해나갔다.


드레스녹 vs 젠킨스 사이의 엇갈린 진술,
과연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북한이 좋은 게 월급도 똑같이 줘, 배급량도 늘어나고”

2005년, 북에는 네 명의 미군 망명자 중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명(앱셔, 패리쉬)을 제외한 드레스녹과 젠킨스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젠킨스가 부인을 따라 딸들과 일본으로 재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상은 다시 한 번 들썩인다. 일본에 도착한 젠킨스는 자신이 북한에서 억압을 겪었으며 북한 정부가 자신의 딸들을 간첩으로 양성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전세계에 보도되었고, 일본인 납치 문제와 결부돼 핫이슈로 부상했다. 젠킨스의 발언에 대해 드레스녹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젠킨스가 거짓 진술을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북한군에 항복하더니 이젠 다시 미국에게 그러네”
평양에서 자신과 젠킨스는 편안한 삶을 살았으며 젠킨스는 북한 정부에게 고초를 당한 적이없다고 단언한 드레스녹과 북한에서의 삶이 지옥 같았다고 언급하며 북한에 간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고백한 젠킨스, 과연 둘 중 진실을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대니얼 고든은 이 사안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양쪽의 입장을 카메라에 담아 관객들에게 선택의 몫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만들어낸 위태로운 행복,
행복의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

드레스녹은 평양에서의 삶이 지금껏 살아온 날들 중에 가장 행복하며, 그 무엇을 준다 해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다. 평양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며 일용할 양식과 의복, 주택을 배급 받고, 낚시와 볼링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그에게는 최고의 가치이다. 북한에 왔기 때문에 영화 배우가 될 수도 있었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 교육시킬 수도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북으로 떠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살았다면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을까? 드레스녹은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 자신한다.

“조선 사람들은 굶어죽었지만, 나는 매일 쌀을 배급 받았어”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도 아닌, 단순히 개인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38선을 넘어간 미군 병사 드레스녹,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일상의 행복들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이 평생 원했던 삶 말이다. 그가 북한의 체제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지, 반대하고 있는지 그것은 확실치 않다. 다만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꾸려나가자는 주체사상의 의미를 좋아하며, 매달 적당량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배급 시스템에 만족해 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나에게는 꼬박꼬박 쌀이 배급됐고 나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에서 북한 사회 속 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반미국가 북한을 택한 미국인, 그리고 그곳에서 수십여 년째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상징은 북한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선전 도구일 것이다. 그리고 북한 체제가 그를 지켜주는 이상, 그는 평양을 지상의 낙원이요, 고향이라 믿고 살아갈 것이다.

“위대한 수령께선 늘 우리를 각별히 염려해주셨어. 죽는 날까지 나라에서 지켜줄 거야”
영화의 라스트씬, 카메라는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드레스녹의 뒷모습을 비춘다. 광장 한 쪽의 확성기에서는 “북한은 완벽한 지상 낙원입니다…공산주의 사회 아래에선 진정한 행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멘트가 흘러나온다.(영화상에서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어쩐지 쓸쓸하고, 허망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만, 그것의 배후에 정치적인 목적과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드레스녹과 이제는 과장된 허풍으로만 들리는 선전 멘트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관객들에게 거대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인이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 사건 일지 ]

망명 DEFECTION

1. 첫 번째 망명자 : 래리 알렌 앱셔(Larry Allen Abshier)

1962년 5월, 보병 제2연대 소속 사병 래리 알렌 앱셔, 돌아오라는 분대장의 명령을 무시한 채 국경 지대 초소를 이탈해 DMZ를 넘다. 앱셔는 임무 도중 무기를 분실해 군사 법정에 서게 될 처지였다. 미국은 앱셔가 남한에 숨어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 달 후 평양 라디오 방송국은 앱셔가 북한으로 망명했다고 발표했다. 곧 “나는 행운아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평양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해 자세하게 적은 북한 선전물이 뿌려졌다.

“남한을 비롯해서 여러 외국의 도시들을 다녀봤지만, 평양처럼 건물이 웅장하고 멋있으며 거리가 깨끗하고 밤이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곳은 본 적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 증오만을 키우고 다른 국가들의 행복과 자유를 파괴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용병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난 진정한 인간으로서 새 삶을 개척하고자 북한으로 넘어왔다.”

중학교 2학년의 학력을 가진 앱셔는 “내 인생 최고로 즐거운 나날들”이라는 선전문에서 그가 얼마나 새로운 삶에 만족해 있는지 강조했다.

“북한으로 넘어온 지 70일이 지났지만 내 삶에서 가장 즐겁고 신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기억은 아마 평생 남을 것이다… 북한엔 실업자가 한 명도 없으며 삶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아파트형 주거단지에서의 안락한 삶을 살고 있으며… 국가로부터 일년에 세 벌의 작업복과 세 켤레의 신발, 우유, 생선, 고기, 식용유, 음료 등을 공짜로 지급받고 있다…”

여러 명의 수양부모를 거쳤던 앱셔는 친부모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힘겨운 학창 시절을 보낸 그에게 군대는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군대에 기재된 그의 집 주소는 ‘일리노이 육해군의 집’으로 되어 있다. 그의 상관은 망명 당시 약혼 상태였던 그가 애인과의 결별에 괴로워하고 있었고 무기를 내려 놓고 DMZ 주변을 배회하다가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의 약혼녀는 다시는 앱셔로부터 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김일성 수령에게 그의 소식을 묻는 편지를 보냈고 그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만을 듣게 되었다.

미군 신문인 ‘Stars and Stripes’는 그의 진술을 조롱했고 그의 변절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것은 물론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일병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에게는 반대의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두 번째 망명자 :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James Joseph Dresnok)
앱셔와 마찬가지로 드레스녹도 고아였고 수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첫 번째 양부모에게 학대당한 그는 그런 아이들을 불쌍히 여겼던 두 번째 양부모에 의해 그 곤경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드레스녹 또한 앱셔처럼 중학교의 학력밖에 없었고 이른 나이에 입대했다. 18세의 드레스녹은 훈련소에서 휴가 나온 사이에 결혼을 하지만 그가 서독으로 파병된 사이 아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에게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상심에 찬 드레스녹은 곧바로 남한으로 파병돼 DMZ의 ‘챨리 중대 제8기병대’에 배속되었다.

드레스녹은 남한에 있는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허가 없이 휴가를 나가 군사 법정에 서게 된 그는 이미 군사 법정에 소환된 기록이 있었던 터라 군사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고 군대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었다. 1962년 8월 15일 군사 법정 재판일 하루 전날, 5명의 미군에게 목격된 마지막 드레스녹의 모습은 DMZ에서 군인용 작업복을 입고 5발분의 탄약과 군용 엽총을 가지고 있는 채였다.

드레스녹의 일기가 곧 공개되었다:

“인민군 장교들은 날 따뜻하게 대했고 나의 결단을 칭찬했다… 마치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갑자기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다(1962년 8월 17일)… 북한은 원하는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회이며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이건 내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노동당과 김일성 수령의 지도력 때문이다(1962년 8월 20일)… 북한은 노동과 휴식의 권리가 보장되는 지상 낙원이다. 난 북한 어린이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한 삶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곳의 아이들에 비하면 나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불행했다(1962년 9월 20일).”

드레스녹과 앱셔는 곧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함께 “그들의 오랜 친구들”에게 환영사를 보낸다.

“남한 주둔 미군 병사 여러분! 북한 인민의 따뜻한 환영을 즐기며 지긋지긋한 미군 군복을 벗고 평양과 다른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미국의 노동 계층이 접하기 어려운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미국이나 남한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북한은 ‘행운아’라는 제목의 선전물을 발간해 이 둘이 접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미군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농장에서건, 공장에서건, 수도의 거리를 걷건 그들은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 선전물을 본 미군들, 과연 동요되었을까?

3. 세 번째 망명자 : 제리 웨인 패리쉬(Jerry Wayne Parrish)
1963년 12월, 제리 웨인 패리쉬는 줄의 맨 끝에서 순찰을 돌다가 동료들을 떠나 군장과 소총을 군사 분계선 근처에 남겨 두고 사라졌다. 군장 옆에는 “막사의 동료들에게 안부 전해주고 엄마에겐 사랑한다고 전해줘. 언젠간 집으로 돌아갈 거야” 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패리쉬는 군 동료들에게 수천 장의 카드를 보냈는데, 손으로 쓴 카드에는 그들에게 자기처럼 넘어오기를 독려하는 문구가 써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망명을 독려하는 이 세 명의 망명자들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DMZ에 울려 퍼졌다.

4. 네 번째 망명자 : 챨스 로버트 젠킨스(Charles Robert Jenkins)
1965년 1월 5일 이른 시간, 그 해 가장 추운 날로 기억되는 날, 하사관 챨스 로버트 젠킨스가 이끄는 네 명의 미군이 DMZ를 순찰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3시간 여 매복 중이던 그들은 새벽 2시 30분경에 막사로 돌아가기로 한다. 젠킨스는 -나중에 순찰 전에 10개 정도의 맥주캔을 마셨다는 것을 시인했는데- 동료들에게 선두에 서서 순찰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3주가 흐른 후에 북한 당국은 북한에서 ‘천국’을 찾았다고 말하는 젠킨스의 메시지를 방송으로 전한다. 젠킨스는 3년 사이 미군을 이탈해 북한으로 망명한 네 번째 군인이었고 특히 환영 받았는데 그건 그가 장교에 무기를 가지고 망명했기 때문이다.

이 네 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아무 걱정 없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모습을 담고 있는 ‘행운아’ 최신호는 미군들에게 천국으로 망명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네 명은 세상으로부터 잊혀졌다.

1996년 미국방성은 이 네 명의 병사가 북한에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국방성은 한국 전쟁에서 실종된 미군들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이 네 명과 접촉을 시도했었다. 평양에선 이 넷이 북한 국민이 되었으며 미국과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이 당시 앱셔는 이미 1983년 심장 마비로 사망한 상태였다. 그의 나의 불과 마흔이었다. 이 사실은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얼마나 그들에 대해서,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패리쉬는 1998년 54세의 나이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미 당국은 다시 미군에 자수하고 투항한 젠킨스를 제외한 세 명을 탈영병으로 보고 있다.


납치 KIDNAP

2002년 9월, 챨스 로버트 젠킨스라는 이름이 매우 묘한 상황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북한 스파이들에게 일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자 13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했다는 확신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8명은 이미 사망했고 남아 있는 5명 가운데 한 명인 히토미 소가는 젠킨스와 결혼한 사이였다. 젠킨스와 그녀는 1980년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납치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2004년 평양에서 젠킨스는 감독에게 그가 단지 소가의 영어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보호자였노라고 고백했다.

2002년 10월 젠킨스의 아내는 귀환 허가를 받아 도쿄로 돌아갔다. 이 일은 일본에서 감동적인 사연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었고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평양에는 젠킨스와 두 딸만이 남았다. 아내가 돌아가자 젠킨스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만약 북한이 그와 딸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면 그는 곧바로 탈영과 적국 협조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일본과 미국 사이의 범죄자 송환법에 따라 강제 출국되었을 것이다.

이 납치 사건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두려움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소가와 젠킨스의 드라마는 일본과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이산 가족들의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북한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이산 가족이 미국과 송환 협상을 맺지 않은 제3국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베이징이 제안되었지만 소가는 그 곳이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상으로 북한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2004년 7월 8일 드디어 인도네시아에서 만나게 된 부부는 눈물 어린 감동의 재회로 전 세계 미디어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들이 도쿄에 도착하자 그보다 더한 환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젠킨스는 설득 끝에 응급 치료를 받고 자수하게 된다.

젠킨스는 일본 내 미군에 투항해 법정에 선다. 이후 그는 그가 북한에서 당국과 동료 망명자들, 특히 드레스녹에게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충격적인 진술을 한다.

“내가 북한 당국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날 묶고 드레스녹을 불러 때리게 했다. 드레스녹은 진정 즐기는 모습이었다. 드레스녹은 196센티미터의 장신이었으며 128킬로그램이 나갔다. 그는 거대했고 사람을 때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하사관이었기 때문에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젠킨스의 군사 법정 재판일은 11월 3일로 잡혀 있었는데 이 날은 전 세계의 관심이 미국의 대선에 쏠려있는 날이었다. 그는 탈영과 적국 협조 두 가지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았고 6개월의 실형을 언도 받았지만 사전 합의에 따라 30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석방된 후 젠킨스는 1978년 아내가 납치되었던 곳인 사도 섬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살고 있다. 그는 “오늘은 내 인생 마지막 장의 첫 날이다. 이 곳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길 소장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로 화제를 모았으며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뒤이은 소문들 MORE ALLEGATIONS

북한이 고의적으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납치해 망명자들과 결혼하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서양인을 닮은 2세를 낳게 해 그들을 첩보원으로 활용할 목적의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다니엘 고든 감독은 북한에서 탄생한 가장 묘한 세대, 즉 미군 망명자의 자녀들을 만난다. 서양인의 외양을 한 아이들은 북한 사회에 전적으로 동조되어 있었고, 한 아이는 조선 인민군에 복무하며 4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넘었던 바로 그 DMZ의 북한 진영을 순찰하고 있었다. 제임스 드레스녹 2세는 평양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며 외교관이 되기를 원한다.

젠킨스의 아내 소가는 북한 첩보원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납치되었다고 했다. 패리쉬의 아내 시함 쉬리테(Siham Shrieteh)는 레바논에서 다른 세 명과 함께 납치되어 평양에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 자신은 그녀 자신의 의지로 북한에 왔으며 패리쉬를 만나 임신하게 된 거라고 반박했다. 젠킨스는 앱셔는 태국인 여성과 결혼했을 뿐 아니라 이전에는 한국 여자친구도 있었으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드레스녹이 북한에서 만난 첫 번째 부인은 루마니아인으로 알려졌으며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북한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드레스녹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에 침묵했지만 그의 두 번째 한국인 부인은 한국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토고 출신이며 평양의 토고 대사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 Production Note ]

2001년 기획부터 2006년 완성까지, 육 년의 세월이 걸렸다!
빅 프로젝트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의 대장정에 대한 짧은 일화들

1. 대니얼 고든 감독,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기획하다 :
2001년 <천리마 축구단>을 준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 중이던 대니얼 고든 감독은 처음으로 북한에 미군 망명자들이 살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된다. 북한 당국에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한 대니얼 고든 감독, 그러나 북한 당국은 망명자들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2. 칠전팔기 끝에 영화 제작 허가를 받고, 촬영에 돌입하다 : 시간이 흐르면서 제작진을 신임하기 시작한 북한 당국은 결국 제작진과 작업 파트너들의 계속된 요청에 못 이겨 촬영을 허락한다. 그리고 드디어 2004년 대니얼 고든 감독은 네 명의 미군 망명자 중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던 두 명의 망명자, 드레스녹과 젠킨스를 만나 촬영을 시작한다.

3. 2005년, 갑작스러운 젠킨스의 일본행으로 난항을 겪다 :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첫 인터뷰를 순조롭게 마친 제작진,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젠킨스는 부인을 따라 일본의 미군에 투항하기에 이르고, 기존과는 상반된 진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북한 정부는 민감하게 촬영에 대해 반응했고, 그래서 이후로는 적은 분량의 촬영 밖에 진행할 수 없었다.

4. DMZ 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하다 : 제작진들은 북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따라 접근이 제한되어 있는 DMZ 지역에서 촬영을 하는데 성공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 언급한 바 있고,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는 군사 지역 DMZ에서의 촬영을 통해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보다 다양한 영상을 추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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